연수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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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수(延壽)는 1926년 경주 서봉총에서 발굴된 은합 명문에 기록된 연호로, 일반적으로 고구려 장수왕 39년인 451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은합과 호우명 그릇의 양식 유사성, 그리고 4세기 말부터 6세기 초에 걸쳐 '태왕' 호를 사용한 국가는 고구려였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다른 설로는 391년, 511년, 또는 신라의 연호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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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고구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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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고구려) | |
연호 | 연수(延壽) |
국가 | 고구려 |
군주 | 장수왕 |
2. 연대 비정
1926년 경주의 서봉총(瑞鳳塚)에서 발굴된 은합(銀盒) 명문에서 '연수(延壽)'라는 연호가 처음 확인되었다.[1] 이 명문에는 ‘延壽元年(연수원년)’이라는 연호와 함께 ‘신묘(辛卯)’라는 간지가 기록되어 있어, 연수 원년이 신묘년임을 알 수 있다.
이 은합이 고구려 장수왕 시대 유물인 호우명그릇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연수'는 451년(장수왕 39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사용한 연호라는 견해가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1] 그러나 이 외에도 391년설, 511년설 등 다른 연대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고구려가 아닌 신라에서 사용된 연호라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1] 각 학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2. 1. 451년 설 (고구려 장수왕)
1926년 경주의 서봉총(瑞鳳塚)에서 발굴된 은합(銀盒)의 명문에서 '연수(延壽)'라는 연호가 발견되었다.[1] 이 명문에는 ‘延壽元年(연수원년)’이라는 연호와 함께 ‘신묘(辛卯)’라는 간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 은합은 고구려 장수왕 시기의 유물로 알려진 호우명그릇과 그릇의 양식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연수'가 451년(장수왕 39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사용한 연호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1]그러나 '연수' 연호의 시작 연도를 391년이나 511년으로 보는 다른 견해도 있으며, 고구려가 아닌 신라에서 사용된 연호라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1]
이홍직이 해석한 은합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분 | 명문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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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면 바닥 | ■수(寿) 원년 태세 재신(辛) 3월 ■태왕 경조 합유(合杅) 3근 |
뚜껑 안쪽 | 연수(延寿) 원년 태세 재묘(卯) 3월 중 태왕 경조 합유 용(用) 3근 6량 |
명문 중 「경조(敬造)」는 「교조(教造)」로 읽어야 한다는 다른 해석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연수 원년이 신묘년에 해당한다는 점은 명확하다.[1]
이 은합이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발굴은 1926년), 처음에는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 경우 신묘년을 391년, 451년, 511년 중 하나로 추정하는 여러 설이 있었다. 하지만 신라에서 공식적으로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536년 법흥왕이 건원 연호를 사용하면서부터이다. 반면, 4세기 말부터 6세기 초에 걸쳐 '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였으므로, '연수'는 고구려의 연호이며 그 시작 연도는 장수왕 39년인 451년이라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1]
391년 설의 경우, 해당 연도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이며, 이미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연수' 연호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여겨진다.[1]
2. 2. 기타 학설
1926년 경주의 서봉총(瑞鳳塚)에서 발굴된 은합(銀盒) 명문에는 ‘延壽元年’이라는 연호와 ‘신묘(辛卯)’ 간지가 새겨져 있다. 이 유물이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발굴 초기에는 이것이 신라에서 사용된 연호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신묘년에 해당하는 391년, 451년, 511년 등이 후보로 거론되었다.이홍직이 해석한 은제 합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 (바깥면 바닥) : ■수(寿) 원년 태세 재신(辛) 3월 ■태왕 경조 합유(合杅) 3근
- (뚜껑 안쪽) : 연수(延寿) 원년 태세 재묘(卯) 3월 중 태왕 경조 합유 용(用) 3근 6량
(명문 중 「경조(敬造)」는 「교조(教造)」로 읽는 다른 견해도 있다.)
이 명문을 통해 연수 원년이 신묘년임은 분명하지만, 어느 시대의 연호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신라 연호설의 경우, 신라가 공식적으로 연호를 사용한 것은 536년(법흥왕 23년) 건원 연호부터이며, 4세기 말에서 6세기 초 사이 '태왕' 칭호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였으므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다.
고구려 연호로 볼 경우, 391년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로 이미 영락 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연수 연호일 가능성은 낮게 평가된다. 511년 역시 신묘년이지만, 함께 출토된 호우명그릇과의 양식적 유사성 등을 근거로 451년(장수왕 39년)을 연수 원년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 외에도 여전히 391년설, 511년설, 그리고 신라 연호설 등이 소수의 학설로서 존재한다.[1]
3. 서력 기원과의 대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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